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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감상/좋은 작품들

정의롭고 맹렬하게 - 밀정

 

정의의 '의'(義)

맹렬의 '열' (烈)

 

의열단의 정의는 이렇게 이름부터 과격하게 투쟁적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단체이다. 약산 김원봉을 리더로 하여 13인의 독립투사로 시작된 이 단체는 지금까지 몇 편의 작품으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 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1920년대 실제 발생한 황옥 경부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지금까지 나온 근대 배경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한 인물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영화 속 이정출(송강호)은 실존인물 황옥의 캐릭터이며, 지금까지도 의열단원인지 일본 경찰의 밀정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이정출이라는 가상인물을 통해, 그가 대한민국을 변절한 친일파 경찰에서 의열단으로 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 '밀정'은 시작부터 의열단의 전설적인 인물인 김상옥을 등장시킨다. 작품 속에서는 김장옥으로 불리는 실존인물 김상옥을 배우 박희순이 열연을 하는데, 그를 체포하기 위해 수십 명의 일본 경찰들이 지붕과 땅을 밟고 추격하는 오프닝 씬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궁지의 몰린 김장옥을, 한때는 동료였던 이정출(송강호)이 일본 경찰이 되어 서로 대면하게 된다. 비록 짧은 등장이었지만 의열단 리더 김상옥이 독기를 품으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인 인트로였고, 배우 박휘순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영화는 의열단이 상해에서 폭탄을 비밀리에 들여와 일본 정부의 중심을 폭파하려는 작전을 그린다. 그리고 이 폭탄 배달 작전은 김우진(공유)과 부하들이 맡게 된다. 한편 자금줄이 막혀 곤란한 의열단의 처지를 안 이정출은 돈 냄새를 맡으며 사진관으로 위장한 김우진의 은신처에 접근한다.

 

서로가 서로를 알지만 태연히 연기를 하며 동태를 살피는데, 김우진은 결국 이정출을 상해까지 유인하게 되고, 이 곳에서 이정출은 뜻밖에도 의열단의 리더 정채산(이병헌)을 만나게 된다. 정채산은 이정출을 궁지로 몰며 아주 솔직한 접대를 한다. 그리고 결국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정채산은 이정출에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당신은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의열단에 잠입한 이정출을 정채산은 역으로 이용한 셈이다. 그리고 이정출은 폭탄 운송을 돕게 된다.

이정출이 의열단의 임무를 맡게 되는 이 중요한 장면에 카메오로 이병헌을 등장시켜 송강호와 만나게 하는 장면은 정지운 감독이 팬들에게 선사하는 작은 선물 같단 생각을 했다.


같은 동포로서 느끼는 동지애와 그 시대 생존을 위한 변절 사이를 오가는 이정출의 모습은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처지를 가감 없이 대변한다. 어쩔 수 없는 혼돈의 시대. 그 속에서 무기력하게 멱살을 잡혀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허수아비 같은 운명의 대한인들. 끔찍한 고문과 억압으로 대한인들을 짓누르는 일본의 통제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이었다.

 

결코 친일파는 미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분명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음'이란 게 존재했고, 거대한 현실을 한 개인이 혼자 맞닥뜨리기는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정출은 이 어려운 현실의 벽을 계란으로 바위를 치 듯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맹렬히 달려드는 동포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서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결국 이정출은 나라를 배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출세욕이 꺾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영화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길 택한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이 가지는 무게감은 최동훈 감독의 '암살'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 시대 특유의 분위기는 내 동료가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고도의 긴장감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칼날 위에 서있는 듯한 아찔함은 기차 수색 시퀀스를 통해 아주 잘 표현되었다. 비록 합이 딱 맞는 치밀한 작전이 아니었지만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히려 현실적이었고,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카메오 출연인 이병헌은 등장할 때 들리는 발소리마저 연기를 하는 듯 놀라운 아우라를 선사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공유는 이 둘과 함께 있을 땐 완전히 시선 밖의 조연이 되어 버렸다. 김지운 감독의 작품마다 배어있는 수컷의 냄새는 송강호와 이병헌만이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뜻밖에 시선강탈 배우 엄태구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연기로 일본 경찰의 무서운 집념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고,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첩보물이라기엔 작전의 치밀한 맛이 적고, 액션 영화로서도 스케일이 크지 않아 실망스러울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나 '암살'보다도 더욱 그 시대의 공기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한 인물에 투영된 그 시대의 가치관은 상업영화의 표면 위로 잘 스며 나왔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형장에서 사라진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는 아무리 많아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