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어떤 신화를 보는 듯하다. SF 판타지로 뒤범벅된 '반지의 제왕'같은 신화라기 보단 사랑의 기원을 노래하며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헤드윅'과 같은 현실에 존재하는 신화를 말한다.
영화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한다. 그때는 두 강대국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시기이자 인간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우주를 정복할 기세로 우주항공 경쟁에 힘을 쏟으며 기술을 훔치는 등 스파이의 활동도 많았던 그때, 이 요란한 상황과 관계없이 그 핵심 장소에서 묵묵히 청소만 하는 청소부들이 있었다.
주인공 엘리자가 바로 그런 청소부 중 한명이다. 엘리자는 농아다. 목에 생긴 상처의 원인은 정확히 모르지만 일찍이 목소리를 잃어 말을 못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도 매일매일 오늘의 운세에 하루를 기대어 보기도 하고 본능에 충실한 쾌락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착한 성품 덕분인지 언제나 그녀를 돕는 동료 젤다와 이웃집 할아버지 자일스가 있다.
그녀가 1급기밀 연구소에서 청소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말을 못 한다는 점과 사회 하류층으로서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일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모를 괴생물체 하나가 잡혀 온다. 물과 육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정부에서는 그 능력을 활용해 우주로 보내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한편, 이 존재를 간파한 소련 또한 생물체를 훔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 존재를 이용할 궁리만 하며 고문을 일삼는 사람들과 달리 주인공 엘리자는 그 존재와 소통을 하며 마음의 문을 연다.
the Origin of Love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 그리고 '근원'이다. 우리가, 아니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는 근원은 물이다. 즉, 너와 나로 나뉜 존재가 아니라 우린 모두 물에서 시작한 같은 근원을 가진 존재란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물을 소재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아냈다.
1960대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인류 발전이 정점에 달해 신의 영역으로 가는 시기이자 인간 스스로를 자연 위에 위치하며 신적 존재라 자부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강대국의 경쟁 상황 속에서 국가주의적 관료와 스파이 활동을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이며, 어쩌면 단조로울 수 있는 괴물과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만든다. 이와 같은 배경은 괴생명체를 마주하는 인간의 잔인한 모습을 담는데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또한 인간끼리의 잔인한 경쟁이 더해져 역설적으로 '사랑'과'근원'을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영화는 이 근원을 이야기 하기 위해 '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던진다. 주인공 엘리자는 농아라서 말을 못 하지만 착한 심성을 가진 순수한 여성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말이라는 것이 엘리자를 제외하곤 모두 갈등의 요소이자 사건의 발단이 된다.
언어라는 것이 생기면서 인류는 사람과 사물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그런 지칭은 계급과 지위를 만들고 나와 다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과 괴물로 존재를 나누고 똑같은 인간을 미국 사람, 소련 사람으로 나누고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나누고, 연구원과 청소부로 나눈다. 그리고 인간으로 지칭되지 않는 존재에게 대해서는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말'이란 것은 이렇게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신적 존재라는 징표이자 무기이며, 심지어 같은 인간을 나누는 도구이다.
그리고 '말'은 약한 존재를 위험에 처하게도 했다. 주인공 동료 젤다가 함묵하며 괴물의 장소를 말하지 않는 모습과 달리 평생 아내에게 따뜻한 말을 하지 않던 젤다의 남폄이 쉽게 불어버린 말이 바로 괴물이 숨은 장소였다. 또한 괴물의 편에 서며 구출을 도운 스파이 연구원이 결정적으로 들켜 죽게 되는 이유도 그가 러시아어를 하는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자가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의 괴물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말로 상대를 지칭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으로 바라보고 괴물을 만지고 마음을 전한다. 달콤한 말의 표현으로 포장된 채 교감한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진심 어린 사랑을 한다.
물의 모양을 닮은 생명의 근원과 사랑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배경은 한결같은 방향성을 가진다. 그녀가 괴물에게 처음으로 전한 삶은 달걀은 생명의 근원의 어떤 형태를 보는 듯 했다.달달한 파이나 요리한 음식이 아닌 삶은 달걀이 가지는 메시지는 크다. 인간과 괴물의 매개체는 전기곤봉이거나 삶은 달걀이었다. 어쩌면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파괴와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걀은 그들의 교감을 자연스레 생명의 근원이라는 메시지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란 제목처럼 영화는 물의 의미를 여러 상황으로 묘사한다. 물을 담는 욕조에서 시작된 자위행위는 그녀가 사랑을 추구하지만 이룰 수 없는 상황을 상징하며, 나중에 그곳에서 진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복선을 깐다. 그리고 물청소로 인간의 더러움과 잔인함을 지운다. 또한 새로운 존재가 잡혀온 곳도 물이며, 그를 탈출시키기로 한 날도 바로 비가 오는 날이다.
치유의 능력을 가진 이 존재는 그녀 목에 난 상처를 아가미로 변화시키고 험한 인간세상을 뒤로 하고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우주로 향하는 인류의 방향과 달리 그들은 물속으로 향했다.
동그란 지구 안으로 향하는 그들, 첫 교감을 한 달걀의 동그란 모양, 그들이 치유될 수 있었던 물을 담는 욕조.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물과 근원에 대한 상징을 담는다. 그리고 물의 형태는 바로 우리 모두라 말한다. 결국 출발이 같은 이 미물들이 내가 더 나은 미물이라 칭하며 서로를 죽이는 비극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랑의 모양을 상기시킨다.
결정적으로 차창 밖으로 흐르는 빗물 두방울이 흘러 흘러 하나가 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욕실 가득 물을 담아 그녀와 괴물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일치한다. 아주 간결하면서 결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씬이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런 신화 같은 이야기를 담아낸 그릇이 너무 좋다
캐릭터 하나하나, 에피소드 간의 연결과 흐름, 복선을 잘 담아낸 소재들, 미장센과 OST까지. 영화는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인 정성이 묻어 나온다.
괴물을 탈출시키기까지 결코 황당한 에피소드가 되지 않도록 설정 장치 또한 꼼꼼하게 만들었기에 새로 산 차를 박살 내며 탈출하는 장면이 주는 의미와 쾌감이 관객들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인 마이클 섀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큰 키에 부리부리한 눈, 피 묻은 곤봉을 내려놓을 때 나는 둔탁한 소리. 삼킬 듯 바라보는 시선. 그는 영화 속에서 가장 미국다운, 가장 권위적인 실루엣을 가졌다. 그는 등장부터 확실한 존재감으로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확실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맛이다. 정성스러운 장면들에 빠져들며 영상과 음악을 즐기는 두 시간. 엘리자와 괴물이 보여준 사랑의 모습을 보며 따스한 기운을 온전하게 전달받은 느낌이다. 비록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거나 이야기일 수 있으나 이 환상적인 분위기는 정말 독보적이고, 장면 하나하나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게 만든다.
난 이 작품으로 인해 아날로그적인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데이빗 보위의 'Five years'를 반복해서 듣게 되었고, 오랜만에 레코드점으로 향하게 되었다. 단순히 좋은 작품이라기엔, 내게 이런 관계없는 일련의 감정들을 막 쏟아져 나오게 한 신비로운 작품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만의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잘 담아낸 '셰이프 오브 워터'는 손에 꼽을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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