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다짐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행위들의 반복이다. 이 일련의 행위들이 반복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어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 노력은 날 배신하지 않는 다는 것. 노력한만큼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옳은 삶이라는 것. 하지만 인생은 이런 우리의 노력을 비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인생이란 그런 쉬운 공식이 아니라고. 그저 운좋게 흐를 뿐이라고. 어쩌면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는 단지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기 위한 변명같은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납득을 해야 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한국영화 곡성을 보고 한가지 확실한 메세지를 얻게 되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는 딱히 이유가 없을 수 도 있다는 것. 참 소름돋는 사실이다. 그저 운으로, 어쩌다가 이렇게 우리들이 여기까지 이끌려 왔다는 점이... 어쩌면 착한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논리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일 뿐 일 것이다.
영화 '매치포인트'는 운으로 위기를 넘긴 남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를 탐닉하곤 죽여버리는 이 나쁜 남자는 결국 평생 잘먹고 잘 살았다는 비틀어진 동화를 들려주는 감독은 다름 아닌 우디 앨런이다. 노망이라도 난 건가.
귀족집에 테니스 강사로 들어간 크리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그 집 아들 톰(매튜 굿)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그 집에서 숨막히게 요염한 미국 여성 노라(스칼렛 요한슨)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톰의 약혼녀. 남의 약혼녀에게 겁도 없이 들이대는 크리스는 그녀의 완강한 거부의사에 결국 포기를 하고, 꿩대신 닭으로 그 귀족집 딸인 클로에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귀족집 사위가 되었으면 정신을 차릴만도 한데, 곧 이어 톰과 노라의 약혼이 깨졌다는 소식에 다시 눈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결국 크리스는 그녀를 탐하게 되고 그렇게 둘의 불륜은 시작된다. 하지만 노라는 이미 이런 관계를 여러번 겪은 탓에 이번엔 남자를 확실히 잡으려 한다. 크리스는 그녀를 섹스 파트너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 같던데, 어느날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통보한다.
부부클리닉에서 수도없이 봤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기엔 인과응보 따윈 없다.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 크리스는 엽총을 들고가서 그녀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강도 살인사건으로 위장을 하기 위해 옆집 할머니도 죽이는데, 이런 비열한 인간의 계획대로 강도 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크리스는 귀족집 사위로 잘 살게 된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단 말인가. 귀족집 사위가 되고, 결혼했으면서도 끝내주는 미국여자와 온 몸을 섞고, 아무일 없다는 듯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다니!
이 결말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이유는 이건 우리가 원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영화에서나마 이런 놈들 벌 받는걸 보기 위해서인데, 우디앨런 감독은 우리들의 기대는 아웃 오브 안중 하시고, 진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봐라. 이런 놈들이 더 잘 산다. 운 좋게도. 게다가 할 거 다하고.
착하게 사는 것과 인생의 성공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디앨런은 우리들의 꿈과 희망 따위엔 관심없어 보인다. 그는 영화를 통해 인과응보식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한 바램일 뿐이지 현실에서는 사실 별로 일어난 적 없는 환타지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지금 내 주변엔 악독한 주인이 있고, 병신같은 상사가 있고,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넘치는데, 착한 내가 왜 이리 힘들어야 하는지를 우디 앨런은 '매치포인트'를 통해 관조적으로 가르쳐준다.
You have to learn to push the guilt under the rug and move on, otherwise it overwhelms you.
도덕과 양심은 성공과 아무 관계가 없다. 착하게 살면 계속 착하게 살 뿐이다.
승패를 결정짓는 마지막 한점. 매치포인트
우리는 인생을 이런 매치포인트를 위해 결사적으로 산다. 반드시 네트 너머로 공을 보내서 한점을 더 따야 잘 될 거라 믿는다. 하지만 인생은 경기가 아니다. 인생은 경기의 룰처럼 점수를 쌓기만 하면 되는 심플한 과정이 아닌 것이다. 마치 멀리 던진 반지가 난간에 걸려 넘어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것이 크리스에겐 오히려 행운이 된 것 처럼 말이다.
The man who said "I'd rather be lucky than good" saw deeply into life. People are afraid to face how great a part of life is dependent on luck. It's scary to think so much is out of one's control.
참 재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경험 많은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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