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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서/소설

살고 싶다면 짐승열차에 탑승하라 - 아메리칸더트 American Dirt

 


멕시코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멕시코 카르텔이 소재인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를 끈다.

'아메리칸더트'는 한 여인이 8살짜리 아들과 함께 라 베스티아라 불리는 죽음의 열차를 타고 카르텔로부터 벗어나는 목숨을 건 탈출기를 그린다.

소설의 시작은 16명의 일가족과 친척들이 몰살된 현장에서 시작한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여성 리디아와 그녀의 아들 루카는 욕조에 겨우 숨어 있어서 살게 되었는데, 그녀의 말로는 라 레추사(부엉이)로 불리는 로스 하르디네로스 카르텔의 소행이라 한다.

추측이 아닌 확신인 이유는 남편 세바스티안이 지역 카르텔에 대한 상세한 기사를 쓴 이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그녀는 과거에 카르텔의 보스인 하비에르와 연인사이였던 적이 있었다.

당장 이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가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미처 죽은 가족들을 애도할 시간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리디아는 고작 8살 밖에 안된 아들을 데리고 카르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투를 벌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민 속 아메리칸 인종과 여성의 이야기


라 베스티아라 불리는 열차가 있다. 짐승이란 뜻인데, 여기에 올라타는 라틴아메리칸 난민들을 태우고 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카르텔로 시작을 했지만 사실 이 라베스티아 열차가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멕시코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는 라 베스티아를 통해 아메리칸의 아픔과 실상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멕시코를 벗어나기 전까지 전지역에 독버섯처럼 자라있는 카르텔의 연락선들을 피하는게 여간 어려운게 아닌다. 카르텔의 기사를 써온 남편 덕분에 그들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리디아는 철저하게 타인들의 시선을 피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남편 친구의 도움으로 쉽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나 했더니 아들의 출생신고서가 없어 탑승을 못하게 되고,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난민들과 함께 라베스티아에 탑승을 하게 된다.

 

실제 라 베스티아 열차의 모습


한순간에 난민이 되어 열차에 오른 리비아는 이곳에서 다양한 아메리칸 혈통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듣게 된다.

이제는 단순 행정처리 오류로 느닺없이 불법체류자가 되어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라베스티아에 탑승하는 사람들까지 생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보는 난민들은 그저 한무리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비친다면, 작가 제닌 커민스는 이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들려주며 난민의 기구한 사연과 높은 장벽으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이 철저하게 단절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우린 아메리카 하면 북미 대륙을 먼저 생각할텐데, 심지어 이 소설의 제목인 '아메리칸 더트'를 보았을 때에도 미국의 병폐를 들추는 소설이 아닌가 하는 선입견이 들기도 했다.

 

멕시코 도시에 있는 라베스티아 그림 벽화


작가는 아메리카 불리는 지역이 시선을 북미가 아닌 멕시코로 모으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모두 여성과 아이들로 설정하면서 인종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 위험을 고스란히 이야기에 녹여낼 수 있었다.
*한편 아메리칸 원주민 혈통도 아닌 백인 여성작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에 반감을 가진 독자들도 많아 이슈가 되고 있다.

여성들이기에 무방비 여정 속에서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위험은 의미심장한 수컷들의 시선과 터치 속에 있고, 틈만 나면 성적 착취의 시도하는 폭력은 분명 남성들의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공포를 보여준다.

특히 난민쉼터에서 만나 여정을 끝까지 같이 하게되는 솔레다드와 레베카 자매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인물로 두었는데, 매 순간 그녀들에게 닥칠 위험을 상상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리디아의 여정을 지도에서 찾아 열심히 그려보았다

 

리디아 전체 여정

아카풀코 → 칠판싱고 (남편친구 카를로스 만남, 선교사 위장) → 악사카쿠알코 (검문 통과) → 멕시코시티 (공항 티켓구입 실패) →부에나비스타역 (ATM 돈 확인) → 레체리아 (처음으로 라베스티아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봄) → 콰우티틀란 → 우에우에토카 (난민쉼터, 선로 걷다 레베카, 솔레다드 자매 만남) → 라 베스티아 첫 탑승! → 산미겔데야옌데 → 셀라야 → 과달라하라 → 마사틀란 → 쿨리아칸 (이민국트럭에 잡힘) → 나볼라토 → 소노라 → 에르모시요역 → 소노라사막 (천식이 있는 베토 만남) → 노갈레스 (엘차칼 만남) → 사막 → 애리조나주 → 동굴 → 19번도로 → 캠프장

결국 그곳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펐다


무너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무법천지가 되어가는 도시를 떠나야 하는 이들의 기구한 운명을 이렇게 자세하게 들여다 볼 기회가 그동안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매순간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하는 상황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굉장히 숨막히게 했고, 매번 달리는 열차 지붕에 오르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지막 생존의 끈을 잡기 위한 몸부림으로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씩씩한 아들 루카의 모습이나 용감한 소년 베토를 보면 장하다는 생각보단 그렇게 훌쩍 성장을 해야하는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졌고, 아름다움으로 인해 너무 쉽게 타깃이 되는 여성의 소리없는 비명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난민들을 사냥하듯 잡고 몸값을 매기는 살벌한 세상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난민들의 여정이 이들에겐 이웃의 일상인 듯 곳곳에 난민쉼터를 두고 운영하고 서로를 돕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범죄 조직이 스며든 망가진 도시에서도 이들은 삶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살 길을 만드는 끈질긴 노력들이 안쓰럽고 서글펐다.


무거운 주제,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


살벌한 살육의 현장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라베스티아 열차로 멕시코 전역을 가로지르면서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아메리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곳 수백명의 난민들에게는 멕시코 국경에 길게 쌓은 장벽 하나하나에 새겨도 될 만큼 수백가지 사연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메리칸 더트'는 작가가 진짜로 말하고자 했던 아메리칸의 이야기, 미국이 아닌 진짜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실제 이야기라는 점에서 '아메리칸더트'가 주는 메세지는 꽤 심도있고 날카롭다.

 

아메리칸 더트 미국판 표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아메리칸더트'는 굉장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냈다.

이야기 내내 끊임없이 예측밖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정말 끝까지 긴장의 끈을 꽉 조인다. 그리고 과달라하라에서 마셰티를 들고 난민들을 도와주는 조력자의 등장이나, 이민국경비에 잡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엘차칼과 함께 사막을 건너는 최악의 여정 등이 이야기를 굉장히 풍성하게 만든 것 같다. 카르텔의 잔인한 처형방식을 잊을만 하면 묘사해주는건 덤인가보다.

'아메리칸 더트'는 작가의 시선과 독자가 원하는 재미를 모두 담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