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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서/소설

사랑하는 사람이 남기고 간 소중한 선물 - 미 비포 유 me Before you

 

손이 잘 가지 않는 장르 중 하나가 로맨스 소설인데, 심지어 나는 영화를 먼저 알았고 결말까지 다 아는 상태에서 굳이 한번 읽어볼 마음이 든 건 정말 뜻밖이었다.

 

'미 비포 유'는 영국출신의 조조 모예스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작품인데, 여느 로맨스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평범한 작품 같지만 사랑과 죽음을 동일선상에 두며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선택해야 할 일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게 한다. 죽을병에 걸리거나 시한부 인생의 마지막 버킷리스트 같은 소재와는 사뭇 다르다.

 


돈 많은 남자와 철없는 여자의 만남?  이거 너무 뻔하잖아...

 

주인공 윌 트레이너는 상류 인생을 살아온 남자이고, 루 클라크는 시골마을에서 아무 꿈도 없이 살며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는 그저 한없이 착한 여성이다. 윌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하반신 마비가 되고 과거에 일군 모든 일들과 인생을 포기하며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현실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이다.

 

루는 일을 하던 카페가 문을 닫아 새로 일을 급히 찾게 되는데, 운 좋게 어느 고성 저택에 사는 돈 많은 집안의 하반신 불구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기로 한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상태로 한명은 괴팍한 성질로 보호인을 하대로 한 명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꾹 참고 밥맛없는 남자의 생활을 보조하며  지내게 된다. 하지만 점차 루는 윌이라는 남자가 겪고 있는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픔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서로 점점 마음의 문을 열고, 각자 가지고 있던 가슴속 깊은 상처를 보여주고 서로를 보듬게 된다.

 

윌이 세상 밖으로 다시 당당히 나서길 바라는 루의 바램으로 함께 바깥바람을 쐬고, 심지어 세계 여행을 다시 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루는 그를 다시 원래 화려했던 인생을 맛볼 수 있게 열심히 돕기 시작한다. 그리고 루는 한 남자를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사랑으로 승화된 것을 느끼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이야기는 이 상반되는 캐릭터 둘이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눈이 맞겠구나 예상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밝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 '미 비포 유' 한장면


당신의 가능성, 잠재력이 보여요. 당신은 여기에 머물러선 안됩니다

 

한없이 맑아보이는 루는 사실 큰 아픔을 가진, 그래서 자신을 숨긴 인물이다.

 

작은 마을을 절대 떠날 생각이 없는 루는 사실 어렸을 적 좋아했던 남자애로부터 성폭행 (소설에선 정확히 묘사되지 않지만 성폭행으로 추측이 된다)을 당했지만 구하러 온 동생 외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가족의 울타리에서 다시는 나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픔을 그에게 털어놓으면서 그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녀를 규정하고 있던 족쇄가 무었이었는지를.

 

영화 '미 비포 유' 한장면

 

윌이 바라본 루는 너무나 훌륭한 인성과 능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저 현재에만 머물며 가족을 위해 희생만 하고 있는 자신을 모른 채 사는 것 같아 보였나 보다. 윌은 하나둘씩 그녀에게 그가 경험했던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녀를 작은 울타리에서 나오게 하려 한다. 

당신을 보면 화가 납니다., 클라크. 왜냐하면 내 눈에는 다 보이는데...... 이 모든 재능과 이 모든 잠재력도. 그리고 난 당신이 이처럼 왜소한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죽어도 못 보겠어요. 전부 합쳐봤자 8킬로미터 반경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고, 당신을 놀라게 하거나 노력하게 하거나 머리가 핑핑 돌다 못해 밤에 잠도 안 오는 일들을 보여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 이런 삶 말입니다.

 

루는 윌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집 밖으로 휠체어를 끌고 나왔지만, 사실 윌이 루와 동행을 하면서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온전했다면 직접 누렸을 이 세상을 그녀에게 가르쳐주기로 한다.

 

윌이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루를 넓은 세상으로 밀어냈다. 이렇게 서로는 각자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서로의 길을 안내했다.

 

영화 '미 비포 유' 한장면


나를 규정하는 것이 내 삶의 이유가 아니라면...

 

그는 사실 안락사가 가능한 국가에 장례 신청을 해놨고, 부모의 설득으로 6개월의 시간을 더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이 그는 루를 만났다.

 

루의 노력으로 윌은 점점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듯 하지만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평생 지난 삶을 그리워하며 지내야 한다는 것. 가망 없는 자신의 신체를 원망하지만 아닌 척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인생을 무책임하게 망가뜨릴 것이라는 것.

 

과연 해피엔딩이라는 것이 죽음을 향할 수 도 있을까? 그동안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이 좋은 결말이라 생각했는데, 하반신 장애를 가진 그에게 삶이 과연 해피엔딩으로 (언젠간) 다가올 수 있었을까? 난 윌이 마지막 선택으로 모든 걸 그녀를 위해 자신의 이상까지 전달하는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서로가 지향하는 곳이 새로운 삶, 그리고 끝내는 삶이라는 게 참 흥미로왔다. 내려놓음 또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음이 인정하기 싫지만 존중해줘야 하는 선택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영화 '미 비포 유' 한장면

 

그리고 이 시점에서 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비슷한 상태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가능성이란 것을 가지고 헤쳐나가는 것과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연명하는 것의 차이.

이 휠체어는 내 존재를 규정해요, 클라크. 당신은 날 몰라요. 진짜 내 모습을. 이 물건이 있기 전에 날 본 적이 없잖아요. 난 내 삶을 사랑했어요, 클라크. 진심으로 사랑했단 말입니다. 내 일과 여행과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모든 걸 사랑했어요. 육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좋았어요. 바이크를 타고 높은 건물에서 몸을 던지는 걸 좋아했어요. 사업 거래에서 무자비하게 승리하는 게 좋았어요...... 나라는 사람은 이 물건에 갇혀서 살 수 있게 생겨 먹질 못했어요. 그런데 의도와 목적에 모두 반해 나를 규정하는 게 이젠 이 물건이 됐단 말입니다. 나를 규정하는 유일한 물건이 됐어요. 

 

죽음을 응원한다는 게 낯선 표현일 순 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렇게 윌의 선택을 존중해주게 되었다. 항상 버티고, 이겨내는 응원을 하는 모습이 희망이 없는 당사자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미 비포 유'는 한편으론 주체성 없는 여성을 한 남성이, 심지어 본인은 인생을 다 포기한 상태임에도 인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모습이 90년대 남성 중심적인 로맨스 장르의 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살짝 아쉽기는 했다.

 

소위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인생 역전을 한 스토리로 치부할 수 도 있는데, 작가 조조 모예스는 그런 점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스스로를 가두고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로 10대 시절 충격적인 사건을 장치로 넣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상반된 두 남녀가 본의 아니게 만나 서로 눈이 맞게 된다는 굉장히 진부한 구조를 가지지만, 그저 사랑을 갈구하는 애절한 이야기는 아니다. 죽음이 사랑처럼 로맨스 장르에서 우리가 원하는 최종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평범할 수 있는 로맨스 장르에 신선한 맛을 더했다.

 


 

"스스로를 밀어붙이면서, 안주하지 말아요. 그 줄무늬 타이츠를 당당하게 입고 다녀요." 윌의 편지 중

 

윌의 화려한 이상이 이제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되는 모습을 보며 루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는 놀라운 마력임에 틀림없다. 

 

그의 바람대로 마을을 벗어나 파리에서 근사한 오후를 보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난 그녀의 촌스러운 당당함을 응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