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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서/소설

세상에서 가장 나쁜년이 되어라 - 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킹의 이야기는 항상 고립된 마을, 문명의 영향이 빨리 전파되지 않는 보수적인 곳, 또는 이번 '돌로레스클레이본' 처럼 외딴섬이 되겠다.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고립은 생각을 잠식하고 실수를 유발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원인 아닌가. 그리고 막연한 공포를 주입시키기도 좋은 소재가 된다. 그리고 고립은 남몰래 어떤 일을 저지르기도 좋은 상황이다. 돌로레스의 이야기처럼.

 

소설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100년에 한 번 오는 개기일식을 기회로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에 그늘을 드리운 용감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이 작품은 꾀나 현실적이고 페미니즘 성향까지 보인다. 


리틀톨 섬에서 벌어진 사고의 살해 용의자 돌로레스, 그녀가 말한다.

 

리틀톨이라는 외딴 섬마을에 한 여자가 심문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유한 집에서 가사를 도우며 일하던 돌로레스는 그 집의 주인 베라가 계단에서 떨어져 죽자 살인범으로 몰린 것이다.

 

돌로레스는 이미 수년 전에 남편이 우물에 추락사를 하면서 남편 살해범 의심을 샀던 적이 있던 터라 유사한 이번 사건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된 것이다. 사실 그녀는 현장에 있었고 우편배달부가 목격한 정황상 그녀는 살해범이 맞겠다. 

하지만 그녀는 평소 잘 알고 지낸 보안관들을 앉혀놓고 그녀의 숨겨둔 과거를 낱낱이 설명하며 오래전 개기일식이 있던 날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베라가 죽은 현상에서 벌어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영화 돌로레스클레이본 - 소설은 오로지 돌로레스의 심문 형식이고, 영화는 엄마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딸이 섬으로 오는 설정이다

 

여기서 굉장히 인상적인 건,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보안관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으로만 소설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돌로레스의 이야기는 챕터 구분도 없이 370여 페이지를 논스톱으로 이어간다. 이건 마치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돌로레스의 이야기를 듣는 보안관으로 빙의되는 기분이다.

 

물론 그녀는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물도 마시고 보안관 서랍에 숨겨둔 술도 한잔 하면 이야기를 전환한다. (이 때문에 책을 잠시 덮어둘 기회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한 번에 다 읽게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매 맞는 엄마의 모습을 물려줄 순 없다.

 

어쨌든, 돌로레스의 이야기는 그녀가 어렸을 적 매 맞는 엄마를 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에게 맞곤 그저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겠다. 돌로레스는 엄마가 그저 뒤돌아 우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반한 남자와 결혼을 했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녀의 부모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편 조는 결혼 직후부터 폭력을 행사하였고 그녀는 그를 고쳐보려 했으나 그저 세월만 흘러 어느새 세아이를 둔 그저 억척스러운 엄마가 되어 있었다.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 - 돌로레스 역의 케시베이츠, 그녀는 남편에게 상습 구타를 당한다

 

그녀는 자신이 봤던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둘째 딸에게는 그녀가 봤던 엄마의 모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매일 일상처럼 매 맞던 어느 날 조를 교육시키기로 한다. 창고에서 커다란 도끼를 꺼내 조 앞에서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녀는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이 사실은 얼마나 겁쟁이인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훈육은 제대로 먹히며 더 이상의 폭력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커가는 딸이 새로운 희생량이 된다. 사실 딸 셀레나는 그날 밤 엄마가 도끼를 들고 아빠를 협박하는 모습을 보며 실상과는 다른 오해를 하게 된다. 셀레나는 이후 지독한 엄마의 그늘에 아빠가 희생자라 생각하며 조의 편을 든다. 하지만 쓰레기 인간 조는 딸이 커감에 따라 살가운 딸에게 터치를 하고, 이는 곧 성추행으로 변해버린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 돌로레스는 딸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이번엔 정말 끝장을 봐야겠다 생각한다. 게다가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찾던 중 남편이 홀랑 빼낸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폭력, 성추행, 목돈 갈취까지... 그녀는 자신이 일하던 집주인 베라로부터 들은 조언대로 100년에 한 번 오는 개기일식날 거사를 치를 계획을 세운다. 


태양을 가린 달,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년이 된다.

 

돌로레스는 '나쁜년'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임을 깨닫고 큰 작업을 실행에 옮기는데, 여기서 그녀에게 자극을 주는 사람이 바로 주인마님 베라이다. 베라 또한 나름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어쩌면 돌로레스를 보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떠올랐나 보다.

 

그녀는 돌로레스에게 간접적으로 소위 나쁜년이 되어야 살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돌로레스가 거사를 치를 수 있게 개기일식날 큰돈을 들여 마을 사람들을 개기일식 파티로 초대한다. 모두가 거사를 목격할 일 없도록.

 

가끔, 어떤 사고는 불행한 여성에겐 최고의 친구가 되곤 하지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 - 베라는 노년에 과거에 저지른 짓으로 고통받는다. 돌로레스는 그녀는 살뜰히 챙겨주는 가사도우미이다

 

남성의 폭력과 세아이를 낳은 여성의 상황은 참 아이러니하다. 결국 폭력과 섹스는 남성이 휘두르는 무기이다. 조의 캐릭터는 그런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성적인 폭력도 행사하는 남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 여성의 임무는 이미 경험이 있는 베라를 통해 돌로레스에게 전수된다. 그리고 돌로레스는 딸을 가진 엄마로서, 매 맞는 엄마의 딸로서 이 남성을 무너뜨리기로 한다.

마치 태양을 가리는 달처럼... 이 여성은 남성의 세상을 덮는다. 그리고 그녀는 개기일식 날 나쁜년으로 다시 태어난다.

 

And sometimes before I went to sleep I'd think: This is how, this is how you pay off bein' a bitch. And it ain't no use sayin' if you haven't been a bitch you wouldn't have had to pay. Because sometimes the world makes you be a bitch.When it's all doom and dark outside and only you inside to first make a light and then tend it, you have to be a bitch.


돌로레스 클레이본 해외판 소설 표지 - 우물에 빠진채 바라본 돌로레스의 모습이 태양을 가리는 달의 모습과 같다


세상은 한번씩은 태양을 완전히 가릴 줄 아는 달의 존재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남성중심의 세상에서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은 나쁜년이다. 여성들은 그렇게 나쁜년이 되어야 그들의 자식들은 개기일식이 나쁜 징조가 아님을 깨닫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돌로레스의 딸 셀레나는 어찌 되었든 하나밖에 없는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자신(성추행당한걸 엄마에게 말한 사실)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가족들은 서로 소원해지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베라의 목소리를 통해 그 정도의 희생이 겁나 자식 몰래 눈물을 훔치는 엄마가 되지 말라고 한다. 그까짓 죄책감보단 내일 맞이할 새로운 세상에서 희열을 느껴보라 한다.

 

그리고 돌로레스가 죄의식을 느낄 때 보이는 어떤 소녀가 있는데 아마도 어렸을 적 자신의 모습인 듯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자신의 과거와 딸 셀레나의 존재를 되뇐다.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

 

돌로레스는 이젠 멋지게 인생을 살 고 있는 자식들을 보며 뿌듯해한다. 돌로레스는 자신을 평생 의심하는 딸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녀는 촌동네를 벗어나 멋진 기자가 되어 있고, 더 넓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녀에겐 그거면 충분한다. 셀레나에겐 남편에게 얻어맞고 눈물을 훔치는 엄마보단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되겠지만 둘 중 하나를 물려준다면 나쁜년의 모습이 더 낫겠다.

 

달의 존재를 깨닫는 밤. 개기일식

 

세상은 한번씩은 태양을 완전히 가릴 줄 아는 달의 존재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오로지 돌로레스의 입을 통해 그녀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지만, 그녀의 주변 인물들과 상황 설명을 너무 찰지게 잘하다 보니 1인칭 시점의 소설인 것을 잊게 만든다. 

그녀의 장황한 이야기는 시작하자마자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데, 그녀의 구구절절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다 보니 370여 페이지를 순식간에 다 넘기게 된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악의 고리를 끊기 위해 많은 걸 희생한 돌로레스의 이야기에 감동과 경외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