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 호킨스 작가의 소설 '인투 더 워터'는 과거 마녀재판에 사용된 드라우닝풀'이라는 물웅덩이를 소재로, 마을에서 연속해서 벌어지는 자살사건을 다룬 스릴러 소설이다. 전작 '걸 온 더 트레인'에서 선보인 그녀 특유의 짜임새 있는 구성을 이번에도 맛볼 수 있는데, 등장인물들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도록 만든 이야기 전개가 특이하다.
줄스라는 여성이 언니 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예전에 살던 부모님 집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랫동안 언니와의 앙금으로 연락을 안 한 지 오래고, 사실 연락이 최근 수차례 왔으나 철저히 무시하고 지낸 상태였다. 언니와의 안 좋았던 과거의 기억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고통인 그녀는 할 수 없이 언니가 남긴 조카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녀가 사는 마을 끝 절벽 아래에는 드라우닝풀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은 과거에 마녀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 마녀로 의심되는 여자를 던져서 물에 떠오르면 마녀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마녀가 아님을 확인하는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였다. 이 곳에 매력을 느껴 드라우닝풀과 얽인 자살이야기들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 조사를 했던 언니가 이 곳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드라우닝풀과 관계된 아픔 기억들이 많다. 패트릭 타운젠드의 아내 로런은 부정한 짓을 저질렀고 결국 이곳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넬의 딸 리나의 절친인 케이티도 어떤 사건으로 인해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마을 이야기를 준비 중이던 넬이 추락사한 것이다.
이들은 과거의 아픔을 덮어둔 채 살아가고 있었는데, 넬의 죽음으로 다시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고, 각자의 진실은 숨긴 채 서로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소설 속 각 인물들과 사건은 모두가 어렸을 적 겪었던 트라우마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결국 응어리져버린 어떤 결과들이나 마찬가지이다. 드라우닝풀처럼 사건의 단상을 그저 쉽게 판단하고 결론지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은 모두 캐릭터들이 어렸을 적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사건의 양상은 다르지만 결국 여성들이 겪어온 수모와 편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줄스는 넬 언니를 몹시 질투하고 있는 뚱뚱하고 소심한 소녀였는데, 넬의 남자 친구였던 마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언니 또한 그녀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기억을 가지고 있어 줄스는 친언니와 연을 끊고 살아왔다. 줄스는 어렸을 적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넬에게 솔직하게 꺼내놓지 못하고 언니에 대한 앙금을 혼자 석화시킨다.
넬의 딸 리나는 절친 케이티의 죽음을 엄마의 탓으로 생각한다. 엄마는 완전히 드라우닝풀과 얽힌 극적인 이야기를 쓰려고 마을 사람들과 인터뷰를 시도하는데, 그들의 아픔에 대핸 아랑 곳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집에 놀러오는 케이티에게 드라우닝풀과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데, 결국 물에 뛰어는 감수성 높은 10대의 자살에 넬이 분명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경찰 션은 이 사건들을 맡고 있다. 션의 아버지 패트릭은 과거에 드라우닝풀에 뛰어든 로런의 남편이고, 션은 어렸을 적 엄마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아이로 마을에서 크게 회자되었다. 엄마가 정말로 자살을 한 것일까? 어린 션은 무엇을 목격했을까?
그밖에도 케이티의 장난질에 걸려든 선생 마크, 션의 부하 경찰 에린, 넬을 저주하는 케이티의 엄마 루이즈, 맛이 간 심령술사 니키 등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들의 곁가지 같은 이야기들도 모두 드라우닝풀을 중심으로 응집력을 발휘한다.
아픈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을 목도한 이들은 '왜'라는 물음은 덮은 채 드라우닝풀의 전설과 연관 지어 부정한 여성들이 죗값을 치른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편견들은 지독하게 일상에 녹아들어 소통의 부재를 낳고 불신의 벽을 쌓는다. 줄스와 넬의 관계나 리나와 넬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줄스는 평생을 언니로부터 받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있다. 하지만 리나가 실종되고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를 성폭행한 넬의 과거 애인과 다시 한번 조우를 하는데, 여기서 그녀를 또 희롱하는 그에게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며 말한다. 당시엔 강간인지도 몰랐던 시절 그저 당하기만 하고 피해자로 전락해버렸던 그녀는 그 사건을 직접 들춰내며 그와 대면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그때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언니 넬에 대한 진실도 알게 된다.
"내가 네 첫 남자였잖아, 응? 오래전 얘기네."
그가 웃었다. 첫 남자? 나는 토할 것 같았다.
"아니 로비."
놀랍게도 내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또렷하고 크게 나왔다.
"네가 내 첫 남자였던 게 아니야. 네가 날 강간했지."
거의 망가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언제... 난 널 강간하지 않았어."
그는 누가 들을까 봐 두려운 듯 '강간'이란 말을 속삭였다.
"난 열세 살이었어. 그만하라고 했잖아. 펑펑 울면서, 난..."
울음이 목까지 차올라 목소리를 삼켜 버리는 바람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 앞에서 울고 싶진 않았다.
언니는 한 번도 그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에게 강간당한 것을 전혀 알지도 못했다! 난 그녀의 외침 후 알게 된 실체 때문에 언니에 대한 오해와 앙금이 눈 녹듯 사라지는 상황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진작에 얘기를 해봤으면, 조금만 용기를 냈으면 어땠을까, 이제야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언니는 죽고 없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
결국 그녀는 언니에게 못한 사랑을 딸 리나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케이티 자살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지만 입을 꾹 닫고 있는, 마치 과거 줄스가 자신의 상처를 꺼내지 못한 것처럼, 리나도 결국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과거 자신의 세대가 겪은 여성 편견과 드라우닝풀의 비극으로 표현하였고, 여성이 겪는 성폭행과 원조교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고 과거의 피해자인 줄스에서 새로운 세대인 리나로 이어지는 여성 피해자들은 더 이상 과거의 비극이 현재 진행형이 되지 않도록 사건을 매듭짓는다.
"그땐 그런 생각도 못했어. 어렸으니까. 지금 너보다 더, 나이뿐만이 아니야, 난 순진했고, 너무 미숙했고, 어리석었어. 요즘 너희들은 합의가 없으면 무조건 강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땐 그런 얘기도 잘 안 하던 시절이었어. 그래서 난..."
"그가 그런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 했던 것 같아. 진짜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몰랐던 거야. 강간이라는 게, 못된 어른이 한밤중에 갑자기 골목길에서 튀어나와서 나를 덮치고 목에다 칼을 대는 건 줄 알았지. 남자애들이 그럴 줄은 몰랐어. 로비처럼 잘생기고, 마을에서 제일 예쁜 여자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남학생 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지. 우리 집 거실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는 좋았느냐고 물어보는 게 강간일 줄은 몰랐어. 난 그냥 내가 뭘 잘못했나 보다, 싫다고 확실히 말했어야 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
"이해를 못하겠어요. 항상 여자들만 탓하는 이모 같은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두 사람이 똑같이 나쁜 짓을 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여자라면 무조건 그 여자 탓이죠. 그렇죠?"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왜 아내들은 항상 상대 여자를 원망해요? 자기 남편을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를 배신한 것도, 평생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것도 남편인데, 절벽에서 떠밀어 죽이려면 자기 남편을 죽여야 하지 않아요?"
각자의 시점으로 현상을 바라보고,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다 보니 이야기의 흡입력이 굉장할 수밖에 없다. 특이한 건 모두가 1인칭 시점으로 쓰였다는 건데, 이야기하다 보니 모두가 소설의 주인공이고 모두가 범인일 수 있는 상황으로 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자의 속마음 속에서 조금씩 실마리를 찾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가 복잡하게 느껴질 수 도 있지만, 점점 퍼즐이 맞춰지는 과정 속에서 상황인식은 점차 명료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범인이 밝혀지게 두지도 않는다. 100여 페이지를 넘긴 후부터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파악이 되고, 마을 사건들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끝날 때까지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든다.
30년 전에 죽은 로런! 죽었으니까 상관없다는 건가? 죽은 사람을 말이 없는 줄 알아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지.
이 마을을 끼고 있는 강물, 모든 게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 없어질 거라는 착각. 다 너를 위해 입을 다무는 것이라는 착각. 그리고 죽음으로 끝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하지만 비극은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광기의 시대에 탄생한 드라우닝풀은 그 형태만 없어졌을 뿐 여성에 대한 편견은 고스란히 남은 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소설 인투 더 워터는 여성에게 투영된 잘못된 인식과 과거 부족했던 성인지 감수성, 그리고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악몽을 드라우닝풀 전설과 미스테리한 사건에 교묘히 결합하여 굉장히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이다.
'자주 독서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렴 - 펭귄을 부탁해 Away with the penguins (0) | 2021.06.06 |
---|---|
ET의 감수성이 완전히 살아났습니다 - 프로젝트 헤일메리 Project Hail Mary (0) | 2021.05.31 |
북극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생존기 - 얼어붙은 바다 The North Water (0) | 2021.01.02 |
너의 아들을 죽여라 - 스티븐 킹 소설 샤이닝 The Shining (0) | 2020.12.21 |
가장 아팠던 기억의 한 조각을 마주하며 - 워터댄서 Water Dancer (0) | 2020.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