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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서/소설

가장 아팠던 기억의 한 조각을 마주하며 - 워터댄서 Water Dancer

 

 

 

언더그라운드레일로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흑인노예 시대에 지하노예해방운동 조직을 지칭하는 말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시대때 비밀독립운동활동을 한 단체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타네히시 코츠의 장편소설 '워터댄서'는 언더그라운드레일로드의 소재에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한 소년의 이야기를 접목하였고, 가족 공동체와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판타지 장르로 풀어냈다.


기억의 힘으로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흑인 소년

주인공 하이람은 기억력이 아주 뛰어난 흑인소년이다. 부유층 백인 아빠와 흑인 노예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랑의 결실이라기 보단 겁탈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하이람은 똑똑한 기억력 덕분에 나름 능력 자랑을 하며 아빠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결국 아빠는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그집안의 장남 메이너드의 하인 노릇을 시킨다.

 

어느날 장남 메이너드를 모시고 마차를 끌고가다가 사고로 강물에 빠지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순간이동 능력으로 강물에서 나와 목숨을 구하게 된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모른 채 신비한 능력을 처음 경험한 하이람은 이와 같은 능력으로 과거에 많은 흑인들을 구출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찾아 탈출을 시도하다 노예사냥꾼에게 잡히게 되고, 그 시대 흑인노예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한편 그가 강물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건으로 인해 언더그라운드 조직은 그의 능력을 알게 되고, 비밀작적은로 그를 구출하여 조직원으로 만든다. 이 곳에서 하이람은 공간이동으로 노예들을 구출한 전설의 인물을 만나게 되고, 그 또한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공간이동을 하는 동안 삶의 기억을 이야기로 계속 풀어내는 것이었다. 강력한 기억을 통해 풀어낸 자신의 이야기, 기억의 매개체가 되는 물건, 그리고 주변에 물이 있어야 능력을 쓸 수 있는 것이다.

 

Water Dancer 해외판 표지

 

 

나의 어머니를 위하여, 돌아올 수 없는 이 다리 너머로 끌려간, 너무도 많은 어머니를 위하여

처음 하이람이 기억력이 좋음에도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장거리로 노예탈출을 시킬만큼 기억 이야기가 많지 않아서였고, 더 근본적으로는 엄마에 대한 기억만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생이별을 하는 흑인노예들이 가지는 아픔을 상징하는 듯 하다. 하이람이 결국 엄마의 목걸이를 매개체로 사용하면서 완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처럼 흑인 노예들이 그 시대를 버티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의 어머니와 뿌리에 대한 기억의 끈을 꼭 쥐고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흑인노예시대에 이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들의 뿌리가 어디서 왔고,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본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은 채 노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내와 자식을 잃고, 가족을을 팔아버린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치욕의 기억은 덮어둔채 스스로 사슬로 몸을 묶고 생존했던 자들이었다.

 

하이람은 아빠라고 불린 그 남자가 엄마를 팔아버렸던 사실을 다시 끄집어내었고, 그는 온전하게 모든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핏줄이 이어져있을지언정 가족을 팔고 노역을 시킨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친자식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소피아가 (또 백인의 겁탈에 의해)낳은 아이를 내 아이로 받아들임으로서 가족의 의미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가장 아픈 기억의 조각을 받아들임으로써 하이람은 완전히 초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흑인들을 사고 팔며 그들의 핏줄을 잔인하게 끊어버렸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외면할지언정 잊지 않았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들은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이 되었고, 결국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워터댄서'는 미국의 흑역사 위에 판타지를 가미한 덕분에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남부의 지독한 노예제도의 중심지에 언더그라운드 활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접근하는 비밀조직의 활약상이나 몰락하는 남부 가문들의 모습은 잘 몰랐던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발견한 듯 흥미로웠다. 비록 초능력을 이용한 통쾌한 활약을 보여주진 않고 흑인노예들의 애달픈 삶도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을 다루면서 이들의 끈질긴 기억과 생명력을 초능력의 원천으로 묘사한 점이 참 탁월하단 생각을 했다.

 

육체적인 고통보단 슬픈 가족애를 통해 흑인노예들의 비참한 삶을 묘사하였기에 특정된 인종문제가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슬픈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언더그라운드레일로드를 묘사한 삽화

 

소설 처음에 '주바'라는 흑인노예의 춤이 언급된다. 그리고 물항아리를 머리에 얹고 춤을 추는 흑인여성이 나온다. 하이람의 기억 속에 뿌옇게 펼쳐지는 춤의 모습들... 이는 소설의 마지막에 와서는 어머니에 대한 선명한 모습과 아름다운 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야기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제대로 볼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전부 보여요. 어머니의 밝고 즐거움 가득한 두 눈, 미소, 암갈색 피부, 그리고 옛 시절에 대해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들이 기억나요. 물 건너에서 가져온 이야기, 제가 착하게 굴면 그날 밤 잠자기 전에, 밤에만 해주던 이야기들요. 그 이야기들이 제 머릿속에서 어떻게 빛났는지, 우리의 밤을 어떻게 색깔로 가득 채웠는지 기억나요. 신들린 것처럼 북을 치던 쿠피와, 노역을 마치고 보상을 받으면 우리가 가게 될 바닷속 천국에서 살았던 마미 와타 얘기도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이들의 노래와 음악이 들리는 듯 하다. 흥겹게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 하이람은 공간을 이동할때마다 안개속에서 물위에서 춤을 추는 유령들과 마주했다. 유령들은 이야기 그 자체였고, 잃어버린 어머니였다.

 

마치 흑인 노예들이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며 부르던 구슬픈 노래들이 엮여 한편의 몽환적인 이야기로 승화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