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맬러먼의 소설 '버드박스'는 최근 넷플릭스의 동명 영화로도 나왔는데, 원작을 찾아보는 호기심이 생겼다.
눈을 뜨면 죽는 아주 극한의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무척 궁금했고, 이런 스타일의 서스펜스 호러가 딱 내 취향에 맞길래 큰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다. 참고로 넷플릭스 영화와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내용 전개가 많이 다르다고 한다.
눈뜨면 죽어버리는 지옥같은 세상
첫 장은 한 여자가 마음을 다잡으며 두 아이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며 집밖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대제 왜 이 여성은 두 아이에게 절대 눈을 뜨지 말라고 하고, 본인도 두 눈을 가린 채 집을 나서는 걸까?
끔찍한 사건이 처음 벌어진 곳은 러시아였다. 평범한 사람이 살인을 하고 자살을 해버리는 사건. 이어 이와 비슷한 일들이 미국 대륙까지 번지게 된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소설은 집을 떠나는 여성 맬로리와 두 아이의 시점과 그녀가 안전가옥 같은 곳에서 사람들과 지냈던 과거 시점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사람들이 미쳐가는 사건이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신문에는 어떤 안전가옥에 대한 광고까지 실린다.
한 가지 실마리는 사람들이 어떤 것을 본 후 바로 미쳐버리면서 죽는다는 것이다.
맬로리의 언니까지 창밖을 보다 자살을 하게 되고, 따로 사시는 부모님까지 연락이 끊긴다. 홀로 남은 맬로리는 임신상태였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안전한 곳으로 가야 했다.
결국 광고에 나온 안전가옥으로 향하는데, 이미 동네엔 시체가 즐비하고 세상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있었다. 눈을 감은채 극적으로 집을 찾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생활을 하지만, 각자의 성향이 모두 달라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차츰 쌓이기 시작한다. 특히 회의주의자 돈은 이 집단에서 갈등의 씨앗이 된다. 그리고 새로 중년 남성 게리가 오면서 사람에 대한 불신과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공포를 느껴도 눈을 뜨면 안된다
새 집에서의 생활은 그나마 숨통이 트이지만, 바깥에서는 여전히 눈을 감아야 한다. 매일 눈을 감고 30m 밖에 있는 우물로 가 물을 퍼담고, 마을 너머로 식료품을 구하러 가기도 하는데, 사실은 너무 평범한 활동들임에도 단지 눈을 감고 다녀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엄청난 긴장을 주고, 일상은 스릴로 돌변한다.
눈을 뜨고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다면 웬만한 코메디 저리가라 하겠지만, 어쩌면 눈앞에 크리처가 바라보고 있을 지도 모를 상황이라 생각하면, 그래서 잠깐이라도 눈을 뜨면 바로 죽고 만다면...어떨까?
집앞 슈퍼도 더듬거리며 가는 이 황당한 상황을 우습지 않도록 하면서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한 점이 나는 참 인상적이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크리처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이 소설에서는 한 번도 크리처가 나오지 않는다. 보는 순간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목격자는 없고, 공포만이 남는다. 주변인들이 모두 죽고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서는 맬로리는 배를 타는 순간부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강기슭에서 들리는 소리, 이제는 눈을 떠도 된다고 하는 남자의 목소리, 그녀를 공격하는 동물의 발톱, 미쳐서 소리 지르는 새의 울음소리... 이 모든 소리의 실체를 그녀는 절대 보지 않는다.
마치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자격시험을 하는 듯 그녀는 눈가리개를 풀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구원의 소리(강의 네 갈래 길을 지나면 설치해둔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고 했다)를 찾는다.
생각해보면 그녀의 언니가 크리처를 보고 죽은 건지 자살을 한 건지 알 수 없다. 안전가옥에서 죽은 사람들 또한 그녀는 다락방에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결과는 처참했지만 어쨌든 무시무시한 크리처를 본 생존자는 아무도 없고, 어쩌면 크리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크리처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괴물이 아닐는지.
결국 안식처를 찾은 그녀는 그곳이 원래 맹인학교 부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그들만이 안전하게 생존해 있었다.
오염된 세상을 본 적 없는 그들에겐 크리처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불신과 선입견,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만이 크리처의 희생량이 되었다.
미지의 존재, 차단당한 감각, 최고조의 서스펜스
눈을 뜨면 죽는다는 설정은 참신한데 유사한 소재를 많이 본 듯하다.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소리르 지르면 죽고,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눈먼 자들의 도시'도 있다.
인간이 가지는 본성이 완전히 상실된 채 극한의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은 공포 장르가 주는 가장 높은 난이도의 문제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콰이어트 플레이스'처럼 임산부를 주인공으로 삼으며 인간이 가지는 가장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상황 속에서 엄청난 서스펜스와 스릴을 만들어낸다.
소설 '버드박스'는 한 여성의 고난의 여정 속에서 선한 인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나 고통 속에서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강인한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이미 미친 사람들이나 아예 눈먼 사람들만 살 수 있는 세상,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더러워진 세상을 크리처라는 소재를 통해 실랄하고 잔혹하게 표현하면서도 다채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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