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스티븐 킹이다. 항상 첫 장부터 빠져들게 만드는 이야기꾼. 재미면에서는 신뢰를 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고른 것이 바로 '인스티튜트'이다. 스티븐 킹의 예전 작품과 근래 나온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최근작들이 확실히 판타지 요소가 많이 가미된 것 같다. '잠자는 미녀들'이나 '부적' 도 뒤집힌 세계와 같은 소재를 다루고, '인스티튜트'는 염력과 텔레파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밀 실험이 주 내용이다.
뮤턴트나 로건, 메이즈러너 같은 영화가 금방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읽기 전부터 걱정했던 부분은 아이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잔인함의 수위가 분명 낮을 것이란 점이다. 소설에선 10살도 안된 아이들도 실험을 당하는데 그 끔찍한 실험을 낱낱이 묘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복수는 어떻게...
어린 초능력자들, 납치되다
소설에서 다루는 초능력은 TK, TP로 칭하는 염력과 텔레파시이다. 태어날때부터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수치가 일반인보다 높은 아이들은 일찌감치 비밀조직의 타깃이 되어 납치되는데, 감금된 곳에서 이들은 강제로 능력이 강화되도록 생체실험을 당하고 사육된다.
주인공 루크는 어린나이에 유명 대학교에 입학 할 만큼 두뇌가 명석한데, 가끔 식사 중에 피자 집게를 떨어뜨리는 수준의 약한 염력을 가진 아이이다.
어느 날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루크는 마취된 채 새로운, 그러나 본인의 방과 거의 똑같은 공간에서 깨어나고, 먼저 감금되어 단체생활을 하는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 모두 TP나 TK로 구분되고 매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종종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수조 고문을 받기도 한다.
놀라운 건 이 비밀 조직의 구성원들이 모두 전직 군인들인데, 이들이 대하는 실험체가 고작 10살 안팎의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창 울고 떼를 쓸 아이들이 이 숨 막히는 곳에서 즉각 적응을 하고 나름의 생존 방식을 (너무 일찍) 터득하는 것 자체가 참 살벌하고 잔인한 상황이란 생각을 했다.
능력을 착취당하는 A동의 머저리들
이 시설은 좋게 말하면 병동이라 할 수 있는데, 총 3단계로 구성이 되어 있어 최초 입소자들이 생활하는 일종이 기숙사 같은 곳이 있고, 본격적으로 능력을 활용하는 단계가 있다. 마지막 단계는 아이들이 아직 가보지 못한 A동 병동인데, 이 곳에는 머저리들이라 불리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TP의 능력과 TK의 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수조 고문을 통해 각성을 하고 두 능력을 겸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이들의 강화된 능력은 일종의 발전기처럼 사용이 되는데, 아무래도 뇌를 많이 쓰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게 되고 침만 질질 흘리며 좀비처럼 살아가는 머저리들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엔... 소각된다.
아이들이 생산(납치)되고 길러져서 쓰이고 버려지는 과정을 알고 난 후, 드디어 A동 지옥의 문이 열렸을 때 보인 그 처참한 상황과 감정적 미동도 없는 시설요원들의 대조적인 모습이 큰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온다.
맥없이 사라지는 서스펜스, 아쉬운 마무리
실험실의 실체가 드러나고, 주인공 루크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까지, 정확히는 탈출의 흔적이 발각되는 순간까지 정말 숨도 안쉬고 읽었다.
거대한 음모는 가린 채 알 수 없는 실험과 속을 알 수 없는 직원들 때문에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기분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읽는 내내 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작품은 이야기의 흡입력이 딱 여기까지만 뻗치고 만다.
루크가 탈출을 한 후 부터는 더 이상 구미를 당길만한 카드가 없어 이야기가 지루해진다. 아이들에게 냉정하고 잔인하게 굴던 전직 군인들이 루크를 좇아와 마을에서 벌이는 총격전에서는 내심 피를 튀기며 내장이라도 튀어나오길 기대했으나, 역시 어린 아이가 껴있다 보니 아주 밋밋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군인들은 쉽게 소탕된다. 분명 전직 군인 이랬는데...
작은 마을을 다 쓸어버릴 것처럼 나오더니 클라이맥스에서 이게 뭐람. 스티븐 킹이 이렇게 총격신을 끝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시설에 남은 아이들은 서로 힘을 합쳐 건물을 통째로 들어 올리기까지 하는데, 이 무시무시한 염력의 파괴도 역시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듯했다.
손을 모으고, 정신을 통일하고, 전 세계 흩어져있는 TP, TK들이 서로 교감하며 원기옥을 한다. 결국 시설은 파괴되고 아이들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다. 그나마 있던 (뭔가 큰 일을 할 것 같았던) 보안실장도 아이들의 초능력 파워에 넋이 나갈 뿐이었다.
사건이 정리된 후 등장하는 진짜 비밀의 인물,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남자가 루크와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 생체실험 조직의 근원과 그들의 존재의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 또한 너무 교훈적인 발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이 소설에서 빌런의 쓰임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본다.
확률과 변수
아이들을 실험하고 쓰고 버리는 목적은 예지자들(또 다른 초능력자)에게서 미래에 종말을 유래할 수 있는 인물 정보를 얻고 아이들의 초능력을 활용하여 원격으로 이들을 제거를 하는 것이다.
이 조직은 스스로 인류를 구원하는 거룩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루크는 말한다. 그 확률이 현실이 되기까지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에 결국 그 확률 수치는 잘못된 것이라고.
세계 종말이 실현될 확률 vs 그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 발생하는 변수
누가 옳다고는 말 못 하겠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므로 희망을 가지면 된다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는 교훈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읽은 게 아니라는 게 나에겐 가장 중요하다.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의 변수 때문에 스티븐 킹 소설이 끝까지 재미있을 확률이 확 줄어든 듯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딱 드는 생각.
이러려고 내가 열심히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까지 달려온 건가 싶다. 2000년대 이후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고어 스타일을 찾기가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과감하고 적나라한 상황 묘사들이 줄어들어 읽는 맛이 떨어지고, 스티븐 킹이 그리는 상상이 한계를 모르고 아주 곧게 뻗어나가길 기대하지만 현실적인 교훈으로 선회하는 점이 참 아쉬웠다. 그의 동료 러스 도어를 그리워하며 쓴 '작가의 말'이 더 애잔했다.
성장소설이라기엔 아이들은 이미 조숙했고, 미스터리물로 보기에 소재가 진부하여 많이 예상 가능하다.
스티븐 킹 특유의 살점 떨어지는 묘사도 약하고, 초자연적인 능력도 너무 현실적으로 강도를 낮췄다.
그럼 남은 건?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개시키는 힘. 그나마 그 힘 하나에 끌려오니 900여 페이지가 쉽게 읽히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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