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K딕의 '스캐너 다클리'를 처음 접하게 된 건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동명 영화였다. 실사 영화에 애니메이션을 입혔던 특이한 영화인데, 배우는 키아누리브스, 로버트다우니주니어, 위노나라이더, 우디해럴스였고, 감독의 전작으로는 비포선라이즈가 있었으니 꽤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캐너 다클리가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고,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은 후 분위기를 전환 할 겸 이 SF소설을 선택하였다. SF소설이라고 했지만 사실 현재에 가까운 미래를 시점으로 하는 듯 한데, 사회는 마약에 찌들대로 찌들어 통제불능 상태가 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통제를 벗어난 마약 세계
소설의 첫 인상은 꽤 더럽다. 아니 상당히 혼란스럽다고 해야겠다.
약에 취해 온몽에서 벌레가 나온다고 떠벌이고 있는 정신나간 제리는 '죽음'이라 불리는 D물질을 먹고 환각작용으로 제대로 생활을 못하는 상태이다.
이 사회는 마약이 더이상 통제가 되지 않을 만큼 사회를 병들게 했고, 공권력도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의 마약기업이 비밀리에 성행하고 있는 상태이다. 여기선 여러 종류의 환각제가 제조되고 유통되는데, D물질이 가장 은밀하면서 치명적인 약으로 마약수사반은 이 유통처를 쫓는다.
언더커버 수사관의 이중생활, 스스로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약쟁이들 너댓명이 모여사는 곳엔 마약수사관이 약쟁이로 위장하여 잠입중이다. 그의 집은 약쟁이 친구들과 생활하는 아지트가 되어 있었고, 친구인 배리스와 찰스가 함께 생활하는 중이다.
밥 아크터는 현실세계에선 마약쟁이들과 어울리고, 수사국에서는 스크램블 마스크를 쓰고 완전히 신분을 숨긴 채 수사 보고를 한다. 따지고 보면 진짜 모습은 스크램블 수트에 가려 익명으로 존재할 뿐이다.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도 D물질을 접하게 되는데, 수사국에서는 장기간 약에 노출된 그를 염려하여 매번 정신상태를 체크한다.
소설에서는 좌뇌와 우뇌를 깔끔히 분리하면 서로 인지가 불가능한 이중적 상태가 된다고 하는데, 밥 아크터의 상태가 딱 이와 같다. 심지어 집안 곳곳에 스캐너를 설치하여 집에서 벌어지는 일과 친구들의 일상을 모니터링하고, 심지어 자신의 행동도 다른 인격체인냥 보고를 한다.
소설 중반까지는 밥 아크터의 생활을 보고하고, 상태 점검을 받는 내용인데, 정신나간 친구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대화를 읽다보면 소위 맛이 간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에서는 떠벌이 약쟁이 캐릭터를 로버트다우니주니어가 연기했는데, 그의 과거 행적을 보면 딱 어울리는 캐스팅이란 생각도 든다.
결국 밥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자신의 분열 증세는 갈수록 심해진다. 마치 정신적으로 두개의 자아가 생기는 것 처럼 시간이 갈 수록 스캐너 화면으로 바라보는 자신을 남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 D물질에 중독되어 수사관 프랭크의 자아와 마약쟁이 밥아크터의 자아가 같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못알아보는 인격분리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진짜 마약쟁이가 되어야 잠입할 수 있는 '뉴패스'재활시설
연방수사국은 참 잔인한 방법으로 수사관을 이용해먹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완전한 중독상태가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뉴패스'재활센터로 잠입하는 것이 작전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 곳은 웬만한 정신상태로는 입실이 안되는, 정말 영혼이 다 빠져나간 상태의 사람들이 들어가는 재활센터인데, 이 곳이 사실은 D물질을 재배하는 곳이었다! (근데 증거가 없어...)
연방수사국에선 바로 여기에 수사관을 잠입시키기 위해 밥 아크터를 이용한 것이다. 재활센터에서 적응을 어느정도 하면 마약 재배지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밥 아크터의 수사는 어느 단계까지 가게 될 것인가?
작전은 결국 성공할 것일까?
재활시설로 들어간 후 브루스가 된 밥은 뇌가 다 타버릴 정도로 미친건지 마지막 작전을 위한 완벽한 위장인지는 알 수 가 없다.
그는 그저 재배지에서 딴 농작물을 몰래 신발 속에 숨기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수사의 희생량이 된 듯한 밥 아크터는 정말로 미친걸까 아니면 엔드게임에 도달한걸까?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하.지.만.
그가 재활센터로 가기 전 자기 자신을 못알아보고 놀라는 상황이나 약을 못 끊는 고통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작전은 실패라는 생각이 든다.
재활센터에서 그의 모습은 아예 남의 말을 따라하는 식물 처럼 묘사된다. 소설속 표현 그대로 뇌가 다 타버린 것이다.
결국 농장에 배치된 그는 그렇게 기다리던 D물질 재배 현장에 오게 된다. 허나 이들에게 발 밑의 식물은 그저 예쁜 꽃일 뿐이다. 더이상 범죄의 현장을 고발할 뇌가 없기에... 결국 약으로 뇌가 망가진 이들은 그 식물 재배 일을 하며 더 많은 식물을 생산하는 노동자가 된다.
마약은 인간을 타락시켰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재배하게 만든다.
아주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스캐너 다클리'는 여느 SF소설과는 결이 참 다르다.
미래사회의 모습은 약에 찌든지 오래고, 미래형 아이템이라곤 스크램블수트 하나 뿐이다. 스크램블 수트는 아마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쉽게 상상하기 힘든 물건인데, 얼굴에 쓰면 본인의 얼굴을 절대 노출되지 않고 다른 여러 얼굴들로 계속 바뀐다.
어쩌면 이처럼 혼란스러운 모습이나 환각상태의 묘사를 위해 영화감독은 애니메이션을 입혀 표현을 극대화 한 것 같다.
작가는 경험에서 나온 환각상태를 그대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작가 주변에서 약으로 인해 죽거나 '뇌가 다 타버린' 사람들을 보며 어떤 경고의 메세지를 담아냈다.
비록 마약근절 이야기로 결론을 낼 수 있지만, 이 외에도 현실에 반영할만한 소재들이 많다. 완전한 익명으로 제2의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나 스캐너로 24시간 감시를 받는 상황이 지금은 일상이 되었기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1970년대는 닉슨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시대이다. 그렇다보니 1977년에 출간된 소설의 미래상은 어쩌면 마약으로 황폐해진 모습이 당연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아주 독특한 SF소설을 통해 나는 마약에게 먹힌 인간의 모습을 통해 아주 끔찍한 미래를, 아니 현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읽고난 후가 더 섬뜩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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