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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서/소설

정유정 데뷔 소설 -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작가의 작품 중 에세이를 제외하고 모든 장편 소설을 다 읽어보게 되었다. 처음 '7년의 밤'을 통해 알게 된 정유정 스타일의 스릴러가 내 구미에 딱 맞았고, 이어서 찾아본 '종의 기원'은 사이코패스의 자아가 된 듯한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어 소설 '28'에 와서는 인수전염바이러스로 인한 인간의 잔인한 모습을 생생하게 목도하였다.

아마 '28'에서 정유정작가에 대한 신뢰가 정점을 찍은 듯 하다. '진이,지니'를 통해서는 뭔가 잠시 쉬어가는 듯 그동안의 템포를 늦추고, 유인원과 인간의 교감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지만 그동안 보아온 정유정스러운 작품은 아니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네임벨류의 시작과도 같은 세계문학상 수상의 '내 심장을 쏴라'를 만나게 되었다.

 

정유정 작가 작품들

한 작가의 작품을 차례로 찾아본 건 더글라스케네디나 베르나르베르베르 정도였지만, 다 신작이 나오면 보는 경우였고, 이처럼 거꾸로 전작들을 차례로 찾아 작가의 세계관을 탐험하는건 처음이었다.


주인공 이수명은 과거 정신분열증이 있던 환자로 정신병원을 옮기며 사는 24살 청년이다. 책방을 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한 채 매번 다른 정신병원으로 이송을 요청한다. 이번에 가게 된 곳은 수리희망병원. 소설은 그가 이 병원으로 가면서 시작한다.

가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이수명은 머리를 깍지 않기 위해 발악을 하고, 이송 첫날 함께 온 류승민과 함께 탈출시도를 하다 격리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둘 병원의 일상으로 이야기는 확대되고, 전형적인 악질간호사와 여러 부류의 룸메이트들이 등장한다.

 

영화 '내 심장을 쏴라'

흡사 영화 '처음만나는자유'처럼 각각의 환자들은 나름의 이유로 이 곳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다.덩치크고 겁대가리 없는 이송동기 류승민, 가장 멀쩡해보이는 모범환자 김용, 열혈학도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가지는 한이와 진이 커플, 우울한수험생 등이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작품들에서 보아온 전형적인 캐릭터들이다.

주인공 이수명의 이야기는 류승민의 이야기로 옮겨가며 이수명은 관찰자가 된다. 그의 인생이야기와 트라우마 극복이 주가 될 줄 알았는데, 류승민의 과거이야기와 비상을 꿈꾸는 그의 소원이 이야기의 축이 되고, 결국 그를 보며 이수명 또한 과거로부터의 도망을 멈추고 현실을 극복하는 자아로 거듭난다.


솔직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제대로 집중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이야기는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다 읽고나서는 모든 상황과 인물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읽는 내내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이 하고자 하는 얘기가 이야기 주제를 흩뜨리는 듯 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결국 2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두 청년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만큼 초반 사설이 길고, 정신병원의 풍경을 너무 찬찬히 그렸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 심장을 쏴라'

게다가 류승민이 글라이딩을 본 후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과 그의 과거가 교차되며 탈출을 꿈꾸는 사람으로 변하면서 그동안 했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들, 간호사 최기훈, 김용, 우울한세탁부, 한이와 지은이, 현선엄마, 점박이, 십운산선생 캐릭터들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소멸해버린다. 사실은 전혀 필요없는 이야기인 듯 말이다. (물론 이들의 존재가 탈출에 큰 도움이 되지만...)


류승민과 이수명의 이야기을 좀 더 깊고 디테일하게 그려냈다면 캐릭터에 공감하며 그들이 자유를 갈망할때 함게 응원할 수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막판 100여페이지에 몰려 있기에 인내를 가지고 읽느라 며칠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 두 청춘은 각자의 자유와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수리봉에서 과감하게 뛰어내렸고 더이상 과거로부터 도망치지 않게 되었지만 뭔가 가슴벅찬 스토리일 듯 말 듯 한, 눈이 먼 류승민이 결국 비행을 하는 그 하이라이트의 순간이 참 맥없이 전개되는, 어디하나 방점을 찍기 어려운 그런 소설이었다.

이 멋진 제목의 소설은 정유적 작가의 초기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듯 하다.


한편 이 소설에서 보여준 주인공의 정신분열증세나 엄마가 죽는 장면들은 이 후 쓴 '종의기원'을 연상케 하고, 보트를 타고 도망치던 호수나 댐공사의 배경은 '7년의 밤'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정유정 작가의 세계관의 시작을 찾는 재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이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영화는 소설과 달리 류승민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배우 이민기와 여진구가 각각 류승민과 이수명을 연기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을 잘 못한 케이스로 평가 받는 작품이지만, 나는 꼭 한번 영화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쨋든 난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28'과 '종의기원'과 같은 스타일로 그녀의 다음 작품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