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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독서/소설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만난 작품 - 바람의 그림자 La Sombra Del Viento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여행을 추억하는 요즘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책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구글링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낸게 '바람의 그림자'란 소설인데, 스페인 출신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2001년작으로 유럽에서는 진작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영어로 번역된 후엔 미국과 영국에서도 백만부 이상 팔린 작품이라 한다. 1930~50년대 바르셀로나를 사실주의 묘사로 담아냈다고 하여 시간여행을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았다. 

 

1930년대 바르셀로나 여행은 뜻밖에도 그 때가 스페인 역사상 가장 암울했고 비극적이었던 시대임을 알게 해주었다.

 

첫 장, 한남자와 아들이 음산한 람블라스 거리를 걷는데, 난 도시의 차갑고 묵직한 공기를 느끼며 조심스레 그들의 뒤를 밟았다.   

 


1930년대, 암울했던 스페인 바르셀로나

 

우선,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2차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스페인 내전은 왕정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롭게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후 시작된다. 인민의 지지를 얻는 토지개혁정책이 기득권과 가톨릭교회 세력의 불만을 샀고, 혼란한 상황을 틈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쿠데타의 리더인 프랑코 장군은 모로코에서 군대를 동원했는데, 이 때 같은 파시즘을 지향하는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강력한 무기를 지원받은다. 이 덕분에 프랑코 장군이 승리하고 60년의 스페인 군부 독재 시대가 시작된다.

 

▲ 게르니카 - 스페인내전 당시  나치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을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

 

이 소설은 프랑코 군부 쿠데타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당시 여러 이념들이 뒤섞인 혼란한 상황 속에서 특히 거세게 저항했던 바르셀로나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역사에 휘말린 가문들이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정부관료였다가 쿠데타로 인해 부랑자가 되어버린 페르민과 실세 권력에 붙어 승승장구하는 잔인한 경찰 푸메로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공권력의 행태도 고스란히 묘사했는데, 난 믿기지 않는 상황을 깨닫기 위해 책과 인터넷을 같이 볼 수 밖에 없었다.

 


잊힌 책들의 묘지, 훌리안 카락스와의 만남

 

주인공 다니엘 셈페레는 바르셀로나의 한 서점가게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람블라스 거리를 지나 어떤 은밀한 서점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소년은 인생의 첫 책을 직접 고른다. 그 책은 훌리안 카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책이었다.

 

작가는 책이란 것은 내가 고르는 대상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기다리는 영적인 존재라 말한다. 다니엘이 잊힌 책들의 묘지라 불리는 곳에서 인생의 책을 고르는 그 순간을 아주 엄숙하고 운명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책은 우리에게 소중한 무언가로 가슴속에 자리매김할 것이라 말한다.

이곳은 신비한 곳이야, 다니엘. 일종의 성전이지.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단다. 책을 쓴 사람의 영혼과 책을 읽으며 꿈을 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장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 우리가 서점에서 책을 사고팔긴 하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지금은 우리뿐이지만, 여기서 네가 보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최고의 친구였어.

 


훌리안 카락스 그는 누구인가?

 

소설의 핵심은 훌리안카락스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다니엘이 '바람의 그림자' 책을 가진 이후로 이 책을 찾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어떤 미스테리한 인물은 책을 불태우기 위해 책을 달라고 협박까지 한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게 된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책을 굳이 불태우기 위해 애쓰는 세력이 있다니... 도대체 훌리안카락스가 누구이길래 그의 책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다니엘은 결국 훌리안 카락스의 과거를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소설은 미스테리한 인물의 행적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고, 여기에 인물들의 사랑과 우정, 가족애, 심지어 적나라한 사회상까지 입체적인 살을 붙인다. 자칫 길을 잃을 수 있는 방대한 이야기이지만 이 모든건 훌리안 카락스란 인물로 향하고, 결국 두 세대에 걸친 감동적인 이야기가 된다.

 

▲ The Shadow of the Wind (미국판 표지)

 

비극의 주인공 훌리안 카락스는 그 시대 스페인이 겪은 내전의 상처를 상징하는 듯 하다. 실제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량이 된 스페인 내전은 분명 많은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이로 인한 수많은 비극적인 이야기가 생겼을 것이다.

 

남은 생을 포기한채 살아가는 훌리안은 스스로 그의 소설속 악마 라인쿠베르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니엘에게서 그가 없애버린 자신의 과거를 보았고, 그가 가졌어야 했던 미래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니엘을 통해 다시 한줄기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이야깃 속 또다른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긴밀하게 연결하는데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훌리안 카락스와 다니엘의 이야기가 평행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훌리안은 다니엘 덕분에 치유될 수 있었고, 그가 겪은 비극이 새로운 세대에게 똑같이 되물림되지 않도록한다. 결국 한 남자의 비극이 한 소년의 성장과 서로 맞닿으며 한 공간 다른 시대를 산 두 남자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감동적으로 마무리된다.

 


50년에 걸친 슬픈 우정과 사랑 이야기

 

'바람의 그림자'는 훌리안카락스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띄워놓고 단서를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면서 진실에 다가갈 듯 말 듯 조바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리고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아예 훌리안카락스의 과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 훌리안과 페넬로페의 사랑이야기는 (지금은 고리타분할 수 있는 전개를 보이지만) 여느 열병에 걸린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 처럼 처참한 비극이었다.

 

그 당시 알다야 가문의 재력가는 훌리안의 당돌함에 매료되어 선뜻 당시 귀족들만 가는 명문 학교에 보내주겠다 약속한다. 그는 알다야씨 집에도 초대받아 동급생 친구와 생활을 하는데, 여기서 알다야씨의 둘째딸 페넬로페를 처음 보고 반하게 된다.

 

이 후 이야기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로 치닫고, 이 어긋난 사랑 때문에 훌리안의 세친구들도 제각각 운명의 길로 가게 된다. 그들의 비틀어져버린 관계는 세월이 흘러 죽는 순간에서야 풀리게 된다.

 


고통은 또다른 고통을 낳고......

 

작가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훌리안의 죽은 영혼으로 비유하면서 그 고통을 세세히 전달한다. 누리안 몽포르트라는 여인이 남긴 긴 편지는 훌리안의 과거를 낱낱히 드러내는데, 편지로 밝혀지는 훌리안의 모든것, 그 시대의 모든것이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이다. 편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상흔이 어떻게 사람들의 영혼을 피폐하기 만들었는지를 담담하게 전달한다.

 

전쟁의 마지막 나날은 지옥의 서곡이었어. 도시는 멀리서 벌어지는, 맥없이 욱신거리는 상처 같은 전투를 겪으며 교전과 폭격과 기아의 몇 달을 보내고 있었지. 살인과 전투, 음모의 망령이 몇 년 동안이나 도시의 영혼을 좀먹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아직 먼 곳에 있다고, 그것은 곧 지나갈 풍랑이라고 믿고 싶어했어. 고통은 눈을 뜨자마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어. 전쟁만큼 망각을 길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
전쟁은 추억이 없어.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전쟁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예전에 남기고 간 것들을 먹어치우는 순간이 올 때까지, 전쟁을 이해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거지.

 


그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걸작

 

바람의 그림자는 미스테리와 로맨스, 서스펜스에 성장코드까지 총망라한 장르라 할 수 있는데, 이야기를 펼치는 솜씨가 정말 기막히게 좋았다.

 

읽다보면 스페인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가 생각이 들다가도, 오페라의 유령이 오버랩되고, 프랑스의 전설 비독과 심지어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까지 떠오른다.

 

읽는 내내 슬픈 바르셀로나의 모습이 참 가슴아팠고, 마치 그 시대에 진짜로 있었을 것 같은 인물들에게선 아련함과 친밀함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다.

 

▲ Els Quatre Gats Cafe - 실제로 피카소가 애용한 카페로 유명하며 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주 가는 카페로 나온다

 

바람의 그림자를 읽은 후엔 지금까지 알던 바르셀로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낡고 부숴진 건물은 전쟁이 남긴 상처의 흔적임을 알기에 그저 운치 있는 곳으로만 생각하지 못할 것 같고, 관광객을 사로잡는 람블라스 거리과 카탈루냐 광장에서는 열심히 뛰어다니는 다니엘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티비다보 애비뉴 32번지를 간다면 베아를 만나기 위해 숨차게 뛰어갔던 다니엘의 간절함이 느껴질 것 같다. 왠지 다음번 바르셀로나 여행을 한다면 엘스콰트레가츠 카페를 가서 페르민과 다니엘이 은밀히 작전을 짰던 자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아버지 서점의 한 단골이, 읽는 이의 심장까지 길을 내서 다가온 첫 책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는 대상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첫 이미지들, 우리가 뒤에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는 그 말들의 울림이 평생 함께하며 기억 속에 하나의 궁전을 아로새긴다. 조만간-우리가 얼마만큼의 책을 읽었는지, 얼마나 많은 세계를 발견했는지, 얼마나 배우고 또 잊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다시 돌아갈 그 기억 속에서, 내게 그 마법의 페이지는 언제나 '잊힌 책들의 묘지'의 복도 사이에서 발견한 그 책일 터였다.

 

잊힌 책들의 묘지에서 다짐한 약속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그리고 이 책을 알게된 독자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바람의 그림자는 누군가에겐 최고의 친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