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각자의 연을 띄우며 - 노르망디의 연 Les Cerfs-volants
로맹 가리 작가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째이다. 가장 먼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쓰고 선보인 '자기 앞의 생'이 있었고, 이번 작품 '노르망디의 연'은 로맹 가리라는 본명으로 1980년에 출판한 것이다.
노르망디의 연은 1930~40년대 독일 나치 시대 프랑스의 한 마을을 풍경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촌뜨기 소년 뤼도와 조금 정신이 나간 집배원이자 뤼도의 삼촌인 플뢰리의 생존과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창하게 전쟁의 잔혹한 풍경이나 비극적인 인물의 운명 같은 걸 그린 작품은 아니고, 무채색의 그림같은 잔잔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사실 너무 잔잔하다. 졸릴 정도로)
주인공 뤼도는 전쟁 전 알게 된 폴란드 귀족가문의 딸 릴라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 주변엔 독일인 한스, 사촌 브뤼노, 아나키스트인 오빠 타드가 등장하는데, 전쟁을 겪으면서 이들은 각각 독일군인, 전투기조종사, 레지스탕스가 된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의 광기가 이 마을까지 불어닥치고, 그들을 각자 운명의 길을 가게 된다. 뤼도는 항상 릴라를 생각하며 비참한 시기를 버티고 또 버틴다.
소설은 참혹한 전쟁의 풍경을 자세히 담지는 않는다. 극적인 상황도 참 건조하게 표현하고, 인물들의 희노애락을 큰 감흥없이 느끼게 한다. 전쟁 묘사 대신 주인공 뤼도의 사랑 이야기와 그가 상상하는 상황들이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어쩌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가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데, 난 이 밋밋한 전개 때문에 심한 따분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노르망디는 나치 시대에 점령과 탈환이 반복된 격전지 중 하나인데, 소설에서는 이 땅을 밟는 독일인과 미국인들에 대항하여 프랑스인의 뿌리 깊은 신념을 지킨 장소로 묘사된다. 특히 요리사 마르슬랭 뒤프라가 운영하는 '클로졸리'라는 레스토랑은 전쟁통에도 프랑스 요리의 진수를 지키면서, 이곳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급 요리를 선보인다. 심지어 독일군들이 있을 때에도 레지스탕스 요원들을 앉히고 요리를 대접한다. 그리고 이곳은 프랑스 대표 레스토랑이자 레지스탕스의 정보 교류 장소로 활약을 한다. 뒤프라는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 레스토랑을 숭고한 대상인냥 종교처럼 믿는다.
뒤프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경멸과 우월감이 실린 미소였다!
봤지? 옆으로 비껴갔잖아. 늘 옆으로 비껴갈거야.
차라리 제목이 클로졸리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로 레스토랑이야 말로 소설의 주인공이고, 뤼도나 '연'을 만드는 장인 플레뤼로부터 얻는 메세지보다 클로졸리의 요리사 드퓌라의 행동이나 릴라가 생존하는 방식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 둘은 주제의식이 잘 갖춰진 캐릭터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야기에 관심이 끌리는 순간들은 모두 레스토랑이나 릴라의 이야기였다)
드퓌라는 나치군인이 노르망디를 점령했을 때 전과 다름없이 프랑스 요리를 당당히 대접하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래서일까 요리만큼은 독일인들도 인정을 했던 것 같다. 한 독일 장교는 전쟁은 제껴두고 아예 그에게 요리를 배우기도 한다. 릴라는 폴란드 귀족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생존 방식을 택한다. 그 밖의 인물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비참했던 시기를 겪고 결국 살아남는다.
플뢰리는 나치 수용소에서 6개월을 보내고 러시아를 통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살이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저 새로 띄울 연을 만들 궁리를 한다. 그 한가지, 사랑하는 연만들기로 그는 긴 전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좋아, 저걸 몽땅 다시 작업하자.......
그런데 과거를 다시 만들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기억하려면 그래야지. 하지만 새것도 필요해. 우선은 드골을 만들자꾸나. 한동안은 그래야지. 그런 다음 다른 걸 찾고 더 멀리 보고 미래를 향해 가야 할 거야....
생존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다. 전쟁처럼 한치 앞을 알 수 없어 하루하루가 운명적인 시간을 보낼 때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건 나의 신념이나 사랑의 대상일 것이다.
플레뤼가 띄운 연처럼... 끊임없이 하늘로 띄워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삶의 방향이란 생각을 해본다.
시골마을의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나치군의 눈을 피해 레지스탕스를 돕는 과정이 좀 더 흥미롭게 펼쳐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고, 각 챕터의 전개가 듬성듬성 건너뛴 느낌도 들어 집중이 흐트러 지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건 길고 장황한 비유적인 문체가 많은건데, 이 때문에 읽다가 종종 맥락을 놓쳐 문장을 되짚어봐야했다. 뤼도의 심리 묘사가 너무 현란한고 낯선 비유적 표현들이 많아 작가의 의도만큼 의미나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또는 번역의 한계일 수 도 있겠다)
이야기에 푹 빠지기는 좀 힘든 소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