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흥미롭게 읽은 근대 동아시아의 역사서이다. 사실 역사서라기 보단 일본의 입장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게 된 거시적이며 운명적인 원인에 대해 설명을 한다. 처음에는 일종의 면피성 내용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만, (물론 그렇기도 하다) 확실히 한때 동아시아의 패권을 가졌던 강대국으로서 소위 노는물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 동안 읽어온 지극히 한국 중심의 시각으로 전쟁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스토리들과는 그 견해가 상당히 다른 점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왔으며, 일본의 호전성과 인정하기 싫은 그들의 멋진 야망에 대해서는 단순히 선과 악으로만 구분하는 시각을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의 동편에 있지만, 국민의 정신은 아시아의 고루함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이웃나라는 지나와 조선 정도다. (...) 내가 보기에 이 두 나라는 서구 문명이 동쪽으로 전진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없다. (...) 그 국토는 세계 문명국에 의해 분할될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한 여유가 없다. 차라리 그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 하고,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임을 고려해서 특별히 대하는 것이 아닌,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것 처럼 대하면 된다.
-시사신보 1885년 3월16일 사설
서양 강대국들의 식민지 놀이에 희생량이 된 일본의 경우는 지리적 동인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맹주였던 중국이나, 당시 선진 문화를 전수 받아온 조선과는 반대로 이미 한대 크게 맞아본 일본으로선 빨리 정신을 차지리 않으면 아시아 전체가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이 조성되어 있었다. 빨리 배우고 개화하여 서양 세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성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조선과 중국에 사상 공유를 하기에 이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런 사상을 조선의 개화파에게 가르치고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끼친다. 물론 3일 천하로 끝난 실패작이었고, 이 후 그가 제시한 탈아론에서와 같이, 몰락하는 아시아의 프레임을 벗어나 서양처럼 발전하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탈아론 이후 일본은 조선과 중국을 이웃국가가 아닌 식민지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게 된다.
물론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는 것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는데,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가 되어 있음에도 빠른 개화와 성장을 하며, 약육강식의 시대 흐름에 따라 군사적 방어선을 위한 식민지 개척에 나서게 된다. 영국의 군사적 파트너로 아시아의 한 끝을 담당할 만큼 성장하며 나름의 '딜'을 통해 조선을 발판삼아 독일 식민지를 정리하고, 제정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며 새로운 아시아 식민지 개척에 나선다.
근대 식민지 제국 중에서 이 정도로 확고한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또 이토록 당국자 간의 신중한 고찰과 광범위한 의견 일치를 보인 나라는 없다. 일본의 식민지는 모두, 그 획득이 일본의 전략적 이익에 합치된다는 최고 수준의 신중한 결정을 근거로 했고 그에 기초해서 식민지를 영유했다.
-스탠퍼드 대학, 마크피티 연구원
여기서 굵직한 전쟁들을 읇어보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은 급격한 성장과 서양세력의 견제자 또는 위협자가 되었고, 제1차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서양 열강들의 땅따먹기 놀이의 패를 쥐게 된다. 서양의 식민지였던 일본은 경제적 속박을 결국 끝냈으며, 경제적 이유로 미국이 일본의 남하를 저지하자 그들을 주적으로 삼아 복수를 다짐한다. 물론... 일본이 그런 당돌한 발상을 할 수 있기 까지는 현실적으로 힘을 키운 결과이고, 아시아의 섬나라가 이런 거대한 체스판의 키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한편으로 부러울 따름이다.
지극히 일본의 입장에서 서술한 전쟁사 이지만 아무리 아니꼬와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계사에서 한국은 어떤 방점을 찍어 본 적이 없는 아마추어 플레이어라는 점이다. 과거엔 중국이라는 큰 형님 옆에서 빌붙어 있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미국과 중국 두 형님을 모시고 있는, 여전히 빌붙는 약소국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일본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정말로 그들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인권을 유린해서일까? 그렇다면 과거엔 그런 침략국가가 없었는지 생각해보자. 원나라에 지배를 받은 시기도 있었고, 고려가 멸망 후 조선은 아예 시작부터 중국에 조공을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또한 6.25가 있기 전에 이미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를 두동강 낼 계획을 가졌었고, 영국과 미국은 한반도에서 대리 전쟁을 치르며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지켜냈다. 여기서 한반도는 언제나 강대국들의 격전지였고, 희생은 우리의 몫이었다.
일본은 이런 부류들 중 하나인데, 특히 이들이 밉상인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과의 나쁜 인연이 역사적으로 가장 최근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일본이 우리보다 소위 잘사는 이웃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의 어머니들을 유린한 나쁜놈들이 너무 잘먹고 잘지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도덕적인 이유보단 경제적인 이유가 현실적이다.
여기서 일본과 한국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미국으로부터 견제를 받아온 일본은 결국 진주만을 공격하는 '깡'으로 한판 전쟁을 치른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를 떠나 그들은 목표를 위해서 인고의 시간을 성장으로 승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언제나 착한 큰형님을 찾아 하소연하기 바빴다. 끝내 강력한 펀치를 한번 날려볼 심산으로 자존심을 버리고 배우고 성장하기 보단, 우리편일 것 같은 형님들을 찾기 바쁜 것이다. 우린 러시아와 미국 등 선진국들의 뒤통수를 맞아왔음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형님을 찾는다.
전쟁이란 절대적으로 발생하면 안되는 비극이지만, 전쟁이 잦았던 그 시기에는, 맞은 만큼 복수를 하려하는 그 자존감을 우린 배워야 할 것이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이 전쟁을 선택한 이유는 그저 광기에 사로잡힌 악랄한 본성이 아니라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강경한 선택인 것이다. 일본의 만행으로 기분이 몹시 나쁘다면? 결국 강해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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